여름에는 식물도 정열적인가?

기온이 점점 오르면서 낮시간의 더위가 제법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봄과 가을 같이 생활하기 좋은 계절이 길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 없지 않지만

들꽃의 세계로 가면 그 또한 인간의 욕심일 뿐입니다.

기온이 올라가는 여름에

더 많은 꽃이 피고 색도 화려해지니 

덥다는 것이 식물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여름하면 뭐니뭐니해도 나리꽃의 잔치가 볼만 합니다.

참나리는 아직 핀 걸 보지 못했지만

털중나리가 피었더군요.

온몸에 잔털이 있어 중나리와 구별되고

주아가 달리는 참나리와도 구별이 되는 친구입니다.

나리꽃 특유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친구이지만

고개를 숙인 모습은, 마치

어여쁜 처자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털중나리]

 

쉬땅나무도 꽃을 피웠더군요.

지역에 따라 시기가 다르겠지만요.

쉬당나무라고도 부르는 이 친구는

비슷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많아 헷갈리기 쉽습니다.

잎모양을 잘 관찰하면 구별하기 쉬울 것입니다. 

[쉬땅나무]

 

화사한 석류꽃의 속도 잠시 들여다 봤습니다.

최대한 석류꽃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 했지만 

꽃잎이 겹쳐 있고 속이 깊어 내가 지닌 사진 솜씨로는

이 정도의 모습 밖에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석류]

 

보라색의 어여쁜 아가씨 자란도 성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원예종이라는 아쉬움만 제외하면

정말 아름다운 꽃이지요.

언젠가는 야생의 자란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란]

 

물싸리풀이라는 이름은 참 낯설지요?

주로 북부 산간 지역에 분포하는 식물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의 물싸리풀은 보기 힘든 셈이지요.

역시 원예종 물싸리풀입니다.

물싸리라는 관목과 혼동하기 쉬운 이름입니다. 

[물싸리풀]

 

털장구채도 멋지게 피었습니다.

그냥 장구채라 이름 붙여도 될 법한데

사진 상으로 털이 많이 보여 털장구채로 붙였습니다. 

[털장구채]

 

인동은 쉽게 볼 수 있는데

붉은인동은 보기가 쉽지 않지요.

어렵사리 한 컷 담아봤는데 꽃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군요. 

[붉은인동]

 

쑥부쟁이도 멋지게 피었습니다.

어떤 분은 쑥부쟁이가 벌써 피었다며 계절도 모른다고 책망하던데

미안하게도 쑥부쟁이는 여름부터 꽃이 피는 식물입니다.

그분이 오해하신 것이지요.

코스모스와 마찬가지로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는데

이 녀석도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니

가을꽃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그럴 만도 한 것이 여름보다는

가을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뭐, 이것도 제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요.

[쑥부쟁이]

 

아무튼 여름에 피는 꽃들은 꽃송이가 큰 것들이 많고

색깔 또한 화려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더운 계절이니까 식물들도 정열적이 되는 걸까요?

 

그 이유를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봄에는 풀들이 아직 무성하지 않기 때문에

꽃대를 높이 올릴 필요도 없고

눈에 잘 뜨이기 때문에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 여름엔 각종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좀더 키를 높이고 화려한 색으로 치장해

곤충들의 눈에 잘 뜨이려 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더 많은 들꽃이 우리 산야에 피어나고 있습니다.

들꽃이 자연스럽게 살아갈 터전을 잘 지켜가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입니다.

 

 

-솔빛에서 곽요한

by mjkcos | 2009/06/26 06:07 | 일반포토갤러리 | 트랙백 | 덧글(1)

군인이야? 패션 모델이야?


 그녀들의 가슴에 누가 총을 쏠 것인가? 
그런 녀석들은 인간도 아니다.

현대의 전쟁은 심리전이다.
미인계 전략을 구사하는 각국의 최신 무기들?

상관의 명령 불복종이 속출할 것 같은 세계의 여군들을 보자.









































































































































































































by mjkcos | 2009/06/26 06:04 | 일반포토갤러리 | 트랙백 | 덧글(0)

6, 25. 전화(戰禍)다시 보기 어려운 처음 공개 귀한 자료

 

***** 6, 25. 전화(戰禍) *****

 

다시 보기 어려운 처음 공개 귀한 자료

 

 아래 사진은 결코 잊지 말아야죠.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by mjkcos | 2009/06/26 06:01 | 보도자료방 | 트랙백 | 덧글(0)

아~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새로운 공개되지않은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2. 금강철교ⓒ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2004 박도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2004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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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2004 박도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2004 박도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2004 박도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2004 박도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2004 박도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2004 박도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2004 박도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2004 박도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2004 NARA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2004 NARA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2004 NARA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2004 NARA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2004 NARA



▲ 1950. 8. 15. 피난민 행렬ⓒ2004 NARA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稚뺙?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2004 NARA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2004 NARA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2004 NARA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2004 NARA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2004 NARA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2004 NARA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2004 NARA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2004 NARA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2004 NARA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2004 NARA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2004 박도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2004 NARA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2004 NARA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2004 NARA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2004 NARA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2004 NARA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2004 NARA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2004 NARA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2004 NARA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2004 NARA



▲ 1950. 10. 1. 소공동 일대ⓒ2004 NARA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2004 NARA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2004 NARA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2004 NARA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2004 NARA



▲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2004 NARA



▲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2004 NARA



▲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2004 NARA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2004 NARA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2004 NARA



▲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2004 NARA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2004 NARA



▲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2004 NARA



▲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by mjkcos | 2009/06/26 05:59 | 보도자료방 | 트랙백 | 덧글(0)

컨스터블 (John Constable : 1776 -1837 )

 

 

A_View_on_the_Stour_near_Dedham  129.5 x 188 cm

 

 

 

A_Water-Mill  63.7 x 89.42 cm

 

 

 

Boat_Building  50.8 x 61.6 cm

 

 

 

Boat_Passing_a_Lock  142.2 x 120.7 cm 

 

 

 

brighton  127 x 183 cm

 

 

 

Brighton_Beach_with_Colliers  14.9 x 24.8 cm

 

 

 

Constable_John_View_Towards_The_Rectory_From_East_Bergholt_House  21.6 x 29.2 cm

 

 

 

Dedham_Vale  43.5 x 34.4 cm

 

 

 

East_Bergholt_Rectory  15.3 x 24.5 cm

 

 

 

Flatford_Mill  101.7 x 127 cm

 

 

 

Hadleigh_Castle  122 x 164.5 cm

 

 

 

Hampstead_Heath  54 x 76.9 cm

 

 

 

Harwich_lighthouse

 

 

 

Landscape_Boys_Fishing 101.6 x 125.8 cm

 

 

 

Landscape_ploughing_scene_in_Suffolk  51.4 x 76.5 cm

 

 

 

Malvern_Hall

 

 

 

Scene_on_a_river  61 x 78.7 cm

 

 

 

Stratford_Mill

 

 

 

Weymouth_Bay  20.3 x 24.7 cm

 

 

 

 

A_Cottage_in_a_Cornfield-31.4 x 26.5 cm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Cornfield
Oil on canvas, 1826
143 x 122 cm

 

 

 

 Salisbury Cathedral from the Bishops' Grounds
Oil on canvas, 1823

 

 

 

The Hay Wain, by John Constable

 
The Hay Wain
Oil on canvas, 1821

 

 

 

The White Horse, by John Constable


The White Horse
Oil on canvas, 1819
131.4 x 188.3 cm

 

 

 

Flatford Mill, by John Constable

 Flatford Mill
Oil on canvas, 1816-1817
101.7 x 127 cm

 
 
 
Wivenhoe Park, by John Constable


Wivenhoe Park
Oil on canvas, 1816
56.1 x 101.2 cm

 

 

 

Golding Constable's Flower Garden, by John Constable

 

 Golding Constable's Flower Garden
Oil on canvas, 1815
33 x 50.8 cm

 

 

Golding Constable's Kitchen Garden, by John Constable

 

 

Golding Constable's Kitchen Garden
Oil on canvas, 1815
33 x 50.8 cm

 

 

 

Mill Stream, by John Constable


Mill Stream
Oil on canvas, c.1814
71.1 x 91.5 cm

 

 

 

Wooded Landscape, by John Constable

 Wooded Landscape
Oil on canvas, 1801-1802
92 x 72 cm

 

  * From - http://www.artrenewal.org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6.11~1837.3.31]

J.M.W.터너와 함께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화가이다. 영국의 지방 풍경을 꾸준히 스케치해서 그린 사실적이고 정감 어린 그림들(예를 들면 1821년의 〈건초 수레 The Hay-Wain〉)로 유명하다. 1828년경 이후에는 보다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운 양식의 그림들(예를 들면 1829년의 〈헤이들리 성 Hadleigh Castle〉)을 그렸다. 1829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컨스터블이 태어난 곳은 서퍽과 에식스를 가로지르는 스투어 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등성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곳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스투어 강 유역은 옥수수와 목초지 및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은 곳으로, 18세기 후반에는 능률적인 농업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서퍽의 주민들은 그들이 사는 지방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지녔으며, 컨스터블도 비록 자주 플랫퍼드에 있는 다리를 건너 에식스로 드나들었지만 실상은 언제나 서퍽의 주민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골딩 컨스터블은 서퍽과 에식스의 스투어 강가에 있는 플랫퍼드와 데덤에 제분소들을 소유한 부자였다. 그의 사업은 그 지방에서 재배한 옥수수를 빻아 그것을 선적하여 이스트앵글리아의 해안을 돌아 런던 시장까지 실어나르는 일이었다. 스투어 강에 운하가 건설되어 이 제분소들 앞으로 배가 드나들 수 있었으며, 곡물들은 널찍한 거룻배에 실려 이 운하의 물줄기를 따라 운송되었다. 컨스터블이 생생한 시골생활을 겪을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그의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는 어린시절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여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그가 이러한 생각을 버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사업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무렵 그는 이미 그림에 열성적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관심은 그 지방의 배관공이자 유리직공이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하던 존 던손과 사귀면서 생겨났으며 미술 후원자이자 풍경화가인 조지 보먼트 경을 만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23세가 되던 1799년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의 견습생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는 전문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그의 재능은 어떤 뚜렷한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솜씨는 어색했으며 실물 소묘는 서툴고 딱딱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의 양식을 머릿속에 뚜렷이 그리고 있었으며 자신의 기술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노력했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지 7~8년이 지난 뒤에는 영국의 시골풍경에 대한 착상을 선배들보다 더 사실적이고 활기에 찬 양식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러한 수련시기에 그린 기록할 만한 약간의 성공을 거둔 몇몇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는 1804년 단 한 차례를 빼놓고는 1802년부터 해마다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당시 풍경화가들이 관례적으로 해오던 스케치 여행을 2차례에 걸쳐 다녀왔는데, 1801년에는 더비셔의 피크디스트릭트, 1806년에는 레이크디스트릭트를 다녀왔다. 그는 서퍽과 에식스의 농부들과 그 아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1805년에는 미국의 망명화가인 벤저민 웨스트의 양식을 따라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 the Children〉라는 제단화를 그렸다. 그러나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발전과정을 검토해보고는 그가 너무 폭넓은 주제와 양식을 시도해왔으며 그결과 힘을 낭비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시절 그에게 기쁨을 주었던 장면들(마을의 좁은 길들과 스투어 강 유역의 옥수수밭과 목초지, 견인마들이 끄는 느린 거룻배들, 플랫퍼드나 데덤의 수문을 지나는 분주한 배들)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1809~16년에 그의 화풍은 성숙되어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료들이 있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런던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는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시골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 있어야 하는 생활에 불편을 느꼈으며, 해마다 서퍽을 방문하려고 애썼다. 1813, 1814년에 그린 2권의 스케치북은 그가 이렇게 서퍽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풍경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들은 현재까지도 원래 상태 그대로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의 고향 마을 주위의 제한된 지역에서 그린 200점이 넘는 작은 스케치들도 있는데 대부분 들판과 강을 배경으로 한 여름의 시골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보다 더욱 그를 불행하게 한 것은 1809년 마리아 빅널과의 관계였다. 그녀에게 구혼했으나, 이스트버골트의 나이 많고 전제적인 교구 사제인 그녀의 할아버지가 가난한 미술가와 손녀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컨스터블은 미술에서 보여준 것과 똑같이 끈질기게 그의 목표에 매달려 마침내 마리아가 결혼을 결심하게끔 했다.또한 당시 컨스터블은 부모의 쇠약함 때문에 불안해했다. 그의 어머니는 1815년에 죽고 그의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죽었다. 그는 부모를 진실로 사랑했으며 그래서 그들이 병상에 있는 동안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1816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어 그해 10월 2일 마리아 빅널과 결혼했으며 이로써, 그의 예술의 발전과 성숙에 꼭 필요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런던에 집을 마련하자마자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당시 컨스터블은 40세가 되었으며 〈데덤 골짜기의 아침 Dedham Vale : Morning〉(1811, 헌팅던셔 엘튼홀 리처드 프로비 컬렉션)·〈플랫퍼드 제분소 근처의 조선소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스투어 강 유역과 데덤 마을 The Stour Valley and Dedham Village〉(1815, 보스턴 미술관) 등 크기는 작지만 독창적인 걸작을 여러 점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들은 아직 준비기의 작품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에 보다 야심적인 그림의 기초가 된 수많은 소규모 유화 스케치와 소묘작품 들이었다. 주로 1808년 이후에 그려진 이 스케치들은 야외에서 대상을 직접 관찰하면서 그린 것들이다. 그중에는 약 30㎝ 너비의 종이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것이 가장 많은데 풍경의 형태와 뛰어난 색채, 그리고 좀더 사라지기 쉬운 분위기와 상세한 세부에 비추어지는 빛의 반사 등이 나타나 있다. 이 스케치들은 현재 컨스터블의 가장 개성적인 작품들에 속하며 특히 당대로서는 유례 없이 독특한 것들로 인정되고 있으나 컨스터블에게 그것들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야망은 서퍽의 시골 지방에 대한 그의 착상을 소재로 하여,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왕립 아카데미의 전시회에서 인상에 남을 만한 풍경화 대작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 첫번째 시도가 1817년에 전시한 〈스투어 강가의 플랫퍼드 제분소 Flatford Mill on the River Stour〉였다. 이 그림은 컨스터블이 2세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제분소 쪽으로 흐르는 강줄기와 그 옆으로 퍼져 있는 벌초된 목초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 뒤이어 6점의 연작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현재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전시된 순서는 〈백마 The White Horse〉·〈스트랫퍼드 제분소 Stratford Mill〉·〈건초 수레〉·〈데덤 근처 스투어 강가의 풍경 View on the Stour near Dedham〉·〈수문 The Lock〉·〈뛰어오르는 말 The Leaping Horse〉이다. 이 6점의 그림은 컨스터블이 어린시절 산책을 다니던 곳 부근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스투어 강변의 풍경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가장 동쪽을 그린 〈건초 수레〉가 있는 곳과 서쪽 끝인 〈스트랫퍼드 제분소〉 사이의 실제 직선 거리는 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장소의 통일성이 주제의 통일성과 결합되어 있다. 〈건초 수레〉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로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룻배들을 보여준다. 컨스터블은 이 작품들에서 구름의 변화와 목초지 및 나무의 색채, 잎과 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를 전례 없이 깊이 연구하여 그것들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일상적인 시골풍경의 구체적인 실제 모습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받은 느낌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823년 컨스터블은 그의 주요한 풍경화인 〈주교의 정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Salisbury Cathedral from the Bishop's Grounds〉을 전시하면서 스투어 강변의 풍경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이 출품작은 건축물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린 것으로, 자신의 독특한 화풍으로 아치형 나무들 사이에 뾰족탑을 설정하고 고딕 양식의 석조물에 대한 명암 효과를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풍경에 곧 비가 내릴 듯한 하늘을 그려놓았다. 이 낭만적인 양식은 주교의 마음을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주교의 조카이자 컨스터블의 오랜 친구인 존 피셔 부감독(영국국교회의 직분)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그는 앞서 1819년의 전시회에서 〈백마〉를 구입함으로써 컨스터블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었다. 솔즈베리 대성당의 그림을 의뢰한 피셔 주교와 컨스터블의 밀접한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대성당 그림에서 컨스터블은 숨기거나 어색한 겸손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무렵 그는 자기 작품에 상당히 만족해 했으며 그의 미술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바가 상당 부분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프랑스 낭만파 화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1821년 〈건초 수레〉가 처음 전시되었을 때 이 작품에 감명을 받았다. 또 이 작품은 1824년 〈데덤 근처 스투어 강변의 풍경〉과 함께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화제를 뿌렸을 뿐만 아니라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감동을 주어 그가 자기 작품 〈키오스 섬의 대학살 Massacre at Chios〉의 일부를 다시 그리게까지 했다. 영국에서 그는 좀더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컨스터블은 1819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지만 정회원의 자격은 10년 뒤에 얻었다.
한편 그의 작품들 중 1819년부터 그린 햄스테드의 풍경들과 1824년부터 그린 브라이턴의 풍경들은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에 닥친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 컨스터블은 오래 전부터 병을 앓고 있던 아내를 위해 공기가 맑은 이 지역에 집을 얻었다. 1828년 아내가 41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자 그는 슬픔에서 완전히 헤어나지는 못했지만, 7명의 자녀들을 위하여 다시 기운을 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인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 재정상태가 나아졌지만, 이무렵부터 그의 그림에서는 불안감이 점차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헤이들리 성〉과 〈목초지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Salisbury Cathedral from the Meadows〉에서는 불연속적으로 강조된 색채와 칙칙한 색조 및 폭풍이 불 것 같은 하늘을 점점 더 많이 볼 수 있다. 1829년에 컨스터블은 데이비드 루카스가 그의 그림과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그와 똑같은 극적인 명암 효과를 흑백 판화로 옮겨 제작한 메조틴트 판화집인 〈영국의 풍경 English Landscape Scenery〉을 출판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이자 미국 태생 미술가인 C.R.레슬리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존 컨스터블의 생애에 관한 회고록 Memoirs of the Life of John Constable, R.A.〉을 썼다. 이 전기는 1843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으며 지금도 컨스터블에 관한 연구의 필수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1820년대에 컨스터블과 동시대인이자 풍경화에서 그와 맞수를 이루던 뛰어난 화가인 터너는 좀더 대담하고 훨씬 자유분방한 색채를 사용했다. 이것은 컨스터블의 후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변화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화이트홀의 계단에서 본 워털루 다리 Waterloo Bridge from Whitehall Stairs〉는 그 다리의 개통식을 기념하기 위한 기록으로, 밝은 색조로 그려져 있다. 그는 더 자주 수채화를 그렸는데, 심한 병을 앓고 난 뒤인 1834년에는 왕립 아카데미에 유화는 1점도 보내지 않고 주요한 전시 작품으로 뛰어난 수채화 대작 〈옛 솔즈베리 대성당 Old Sarum〉(런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박물관)을 보냈다. 그는 같은 해 여름에 애런들을 방문하여 나무가 무성한 가파른 언덕들이 많은 새로운 시골 풍경에 깊이 매료되었다.
1836년 컨스터블은 왕립 아카데미의 전시회에 〈콜레오튼의 기념비 The Cenotaph at Coleorton〉를 보냈다. 그것은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전시한 그림이었다. 그가 죽기 전날까지 그려 거의 완성 상태였던 〈애런들 제분소와 성 Arundel Mill and Castle〉(오하이오 톨레도 미술관)은 왕립 아카데미의 다음 전시회에 유작으로 전시되었다.
그가 죽자 그의 명성은 떨어졌지만, 그의 작품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를 더욱 찬양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는 19세기 내내 서서히 증가해 그의 스케치들이 널리 알려지고 그 참신함과 자연스러움이 인정되면서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1843년 그의 첫번째 전기작가인 레슬리는 그가 "가장 진정한 영국의 풍경화가"라고 썼는데, 그것은 현재 거의 보편적으로 재확인되고 있는 평가이다.

by mjkcos | 2009/06/26 05:55 | 회화/조각/서예/공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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